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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ronSam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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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   <Funk> 2-22. 앙갚음 [1]
2009/10/04   <Funk> 2-15. 대부 : 소울 파워
<Funk> 2-22. 앙갚음

앙갚음


반면 1973년까지 브라운의 개인적 삶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음악 외적인 압박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6월에는 사랑하는 아들 테디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닉슨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국세청the IRS로부터는 450만 달러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훗날 밝혀진 국세청이 브라운에게 행한 표적 세무 조사는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의 브라운에게는 별반 도움이 못되었다.) 브라운은 두 영화(<흑인 시저Black Caesar>와 <도살자의 대사기극Slaughter's Big Rip Off>)의 음악을 맡았는데, 넘버 원 히트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많은 속편들이 제작되었다. 제이비스가 두 번째 앨범 <Doin' it to Death>는 “프레드 웨슬리 앤드 더 제이비스”의 이름으로 발매가 되기는 했어도 그 해의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제임스 브라운의 앨범이었다. 스티비 원더나 마빈 게이, 혹은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를 사용하는 여타의 뮤지션들이 눈에 띠게 성공을 거둔 반면, 대부는 방송도 타지 못한 채 점차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 해 세 번째 영화의 음악을 맡기로 계약하고 나서, (<흑인 시저>를 감독했던) 래리 코헨Larry Cohen과 웨슬리, 메이시오, 지미 놀렌 등의 도움으로 그의 가장 강력한 작품, “앙갚음The Payback"을 녹음했다. 웨슬리는 그 특별한 작품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건 아주 급작스러운 일이었지요. 역동적인 기타 사운드는 제임스 브라운의 콧노래에 맞춰서 지미 놀렌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유명한 관악기 리프들은 사실 음조에서는 어긋난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은 제가 써온 가사를 찢어버렸죠. 그의 보컬은 완전히 즉흥적이었어요. 그런데 (드러머) 자보 스탁스는 모든 것에 먹혀들만한 강력한 비트를 연주해냈어요. 우리가 녹음을 끝났을 때, 엔지니어가 리믹스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러자 브라운이 소리를 질렀어요. “그거 손대지 마!”

웨슬리가 타이틀 트랙을 (감독인) 코헨에게 가져가자, 코헨은 놀랍게도 그 사운드트랙을 거부하면서 프레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이건 좀 덜 훵키한 것 같아, 자기야, 나는 좀 더 제임스 브라운적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제임스 브라운은 즉시 그것을 자신의 정규 음반으로 발매했고, “The Payback"은 바로 넘버 원 히트를 기록했다. 이 당시가 브라운의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정치적 성향 때문에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감독 코헨으로부터 거절당한 데다(브라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뜻대로 내리지 못한 의사 결정이 몇 있었다.) 그의 흑인 음악 동료들로부터 버림받자, 그 설움은 모두 사악한 기타와 과격한 드럼 그리고 그의 전매특허인 외마디 소리로 나타났다. “나는 미쳤다!I'm mad!”

그러던 중, 프레드 웨슬리와 메이시오 파커는 제이비스 사운드를 보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소울풀하고 확고한 훵크의 저장고로 발전시켰다. 능글맞고 민활하면서, 노골적이며 더럽게, 그럼으로써 제이비스는 흑인 소울 리듬의 화신이 되었으며, 제이비스의 파생 프로젝트spinoff project인 프레드 웨슬리 앤드 더 제이비스, 메이시오 앤드 더 맥스Maceo and the Macks, 뿐만 아니라 가수인 바비 버드, 린 콜린즈Lyn Collins, 마바 위트니Marva Whitney 등은 제임스 브라운의 제국 - 당시 그의 밴드의 천재성 - 을 강화해 주었다.

브라운은 <The Payback> 앨범을 내고 1974년에는 뒤이어 더블 앨범인 <Hell>을 냈는데, 이 음반은 사회 비평으로 가득 차 있었고 현재의 고전이자 가장 많이 샘플된 “Papa Don't Take No Mess"의 30분에 걸친 연주가 담겨 있었다. 또한 웨슬리의 독특한 훵크 리듬 편곡이 가미된 또 다른 프로젝트가 1974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것이 곧 <Reality> 앨범으로 재기발랄하면서도 부드럽지만 또한 필요불가결한 70년대 리듬의 사악한 완성작이었다. 그 앨범은 또 다른 스탠다드 훵크인 ”Funky President"와 아트워크나 가사 그리고 레이아웃이 강력한 사회적 의식과 소울 음악의 사명을 보여주었지만, 레코딩의 음질은 끔찍했다. 그 앨범은 마치 ‘모노’로 녹음한 듯이 들렸으며 보다 화려한 70년대 초기의 밴드들, 예를 들어 오하이오 플레이어즈, 아이즐리 브라더스,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그리고 불굴의 스티비 원더의 날렵한 패키지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 뒤로부터 브라운의 음반들은 다소간 형식적인 리듬에 갇혀버렸고 댄스 싱글은 한두 장 정도만 만들어낼 지경이었다. 작열하는 타이틀 곡 “Get Up Offa That Thing"이 1976년에, “Body Heat”가 1977년에, 그리고 “For Goodness Sakes, Look at Those Cakes”가 1979년에 나왔는데 거의 앨범 판매는 기록하지 못했고, 괴물 같은 댄스 곡 "Nature", "Jam" 그리고 “The Spank"가 제임스 브라운이 1978년 발표한 <Jam/1980s>에서 싱글 커트 되었지만 조용히 묻혀버렸다. 앨범 포맷은 제임스 브라운이 바란 대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수많은 모방자들이 70년대의 십년 동안 팝 스타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많은 훵크 아티스트들이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 사운드에 충실했으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다들 한 밑천을 잡은 반면, 브라운은 때때로 소울 차트에는 올랐지만 팝 차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75년의 "Dead On It"의 잼 세션의 간주곡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반박한다.

이제 우리가 이 세션을 끝낼 때쯤이면, 사람들은 훵크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게 될 겁니다 볼 때마다,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나는 제이비스를 듣고, 제임스 브라운을 들어요. “이런 세상에, 좋은데?”라고 말하기는 그렇겠지만 뭐 괜찮아요. 난 상관 안 해요. 사람들이 내게 무슨 로열티를 지불한 것도 아니고 다른 쇼에 나와서는 “이봐, 내가 이걸 다 혼자서 만들어냈단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제임스 브라운을 들어보세요. 그들이 제게 물어봐야 할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왜냐하면 내가 크게 소리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계속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70년대 댄스 음악에 일어난 많은 변화로 인해, 제임스 브라운 사운드는 P-훵크의 영향을 받은 후기 댄스 음악에 대한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인 선구자 역할 정도로 화석화되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언더그라운드로 내려앉았고, 60년대 열정적인 흑인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인물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는 70년대 영화 <닥터 디트로이트>와 <블루스 브라더스>에 출연했지만 영화 <록키 4>에 삽입된 싱글 “Living in America”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기록할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1950년대 이후로 꾸준히 앨범을 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

by BaronSamdi | 2009/11/25 20:23 | "F"unkatology | 트랙백 | 덧글(1)
<Funk> 2-15. 대부 : 소울 파워

7장

대부 : 소울 파워

“우리가 이 세션을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훵크가 나왔는지 알게 될 겁니다.”
-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은 1933년 5월 3일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반웰 외곽 소나무 숲에 위치한 단칸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브라운이 4살이 되던 해 이혼했고, 그의 아버지는 어린 브라운을 부양하기 위해 그를 내버려둔 채 장시간 일을 해야 했다. 오두막집을 전전하면서 살던 그는 6살이 되자, 조지아 주 어거스타의 고모가 운영하는 매음굴로 이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도박, 밀주 그리고 매춘” 사이에서 성장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는 춤을 춰서 돈을 벌기도 하고, 구두도 닦고, 목화도 땄으며, 운동도 하고,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다 마침내 물건을 훔치기에 이른다. 그는 여러 번 “복장 불량”을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와야 했다. 15살이 되어 코트를 훔치기 위해 차를 부순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가스펠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는데, 이는 3년 후 가석방으로 출옥했을 때, 연예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제임스 브라운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음악가로 인정받았고, 좋은 매너와 매력적인 품성 그리고 일에 열성적인 모습을 통해서 교회 사람들 혹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이집 저집을 전전할 수 있었다. 브라운에게 내려진 대부분의 법정 판결은 미국의 가혹한 사회 체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그에게 동정적인 흑인 공동체의 네트워크 덕택이었다. 브라운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첫 번째 밴드 지휘자였던 바비 버드Bobby Byrd의 어머니가 그를 집에 받아들였고, 버드 가족의 관대한 보살핌은 이후에도 성심껏 이어져 브라운의 음악 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2년, 바비 버드의 가스펠/ 두-왑 그룹에 참여한 뒤, 그는 번개같이 빠른 몸놀림, 다리 찢기splits, 미끄러지는 발놀림slides 그리고 낙타 걸음camel walk 덕분에 차츰 밴드의 중추가 될 수 있었다. 후에 이 밴드는 '플레임즈The Flames'가 된다. 플레임즈는 곧 랠프 베이스Ralph Bass를 만나서 신시내티의 킹 레코드 산하의 페더럴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다. 이 그룹은 혹독하게 투어를 돌고, 노래를 하고, 역경을 견뎌내면서 점점 쇠락해버렸다. 제임스 브라운의 1956년 작 “Please, Please, Please”는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R&B의 고전이 되었고, 1958년에 뒤이어 발표한 “Try Me”가 그를 전국적인 스타의 위치로 높이 쏘아올렸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아폴로 극장의 공연에서 콘서트를 주최했고 이 실황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최초의 성공적인 흑인의 콘서트 실황 음반이었다. 이 앨범은 이내 팝 차트 정상으로 솟아올랐다. 1963년이 되기까지 브라운은 수많은 댄스 히트곡과 발라드 곡을 레퍼토리로 삼는 흑인 음악계의 최고의 거두였으며 그의 호소력은 인종적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호텔 라운지와 대학의 학생 회관에서부터 화려한 R&B 댄스 홀과 시의 음악당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브라운은 나타날 때마다 작은 소용돌이를 휘몰고 다녔다. “제임스 브라운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하던 짓을 멈추고 돈을 모았죠.” 피 위 엘리스는 (제임스 브라운의 전기) 작가 신시아 로즈에게 아무런 과장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거다! 하면서 모두가 몰려 갔지요.”

브라운은 그의 음악을 보다 색다르고 재즈적인 요소가 더 가미된 형태로 편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악기들을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재즈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잼 세션은 무대 위에서나 스튜디오 안에서나 그의 창조성 속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제임스는 그의 밴드로부터 영혼을 쥐어짜냈고 그 결과물을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배치했다. “당신도 그걸 따라잡으려면 머리를 좀 빨리 굴려야 했을 겁니다.” 색소폰 연주자 메이시오 파커Maceo Parker가 1990년 로즈에게 한 말이다. “일례로 많은 솔로 연주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그가 이름을 크게 외치면 그냥 목청껏 불어야 했지요. 흘러가는 연주에 잘 맞아 들어가기를 바라면서요.” 그것이 바로 "임프로비제이션(즉흥성)improvisation"이었다. 임프로비제이션(즉흥성)은 이 소울 대부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졌으면서 제임스 브라운 음악의 엔진을 가동시켰다. 대중들의 추측과는 반대로, R&B 가수로서의 그의 명성은 그의 예술적 취향에 비하면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나는 결코 R&B 가수였던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로 분류될 뿐이죠.” 그는 1986년에 기자인 츄이 발레라Chuy Valera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음악은 가스펠과 재즈, 그리고 소위 훵크와 소울이라고 불리는 것들로부터 왔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훵크와 소울이야말로 진정코 재즈가 아닐런지요.” 그의 밴드 지휘자들이 뛰어난 재즈 연주자였던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훵크 태동기의 밴드 지휘자였던 앨프리드 “피 위” 엘리스는 1965년 밴드에 들어올 당시, 위대한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의 음악을 연구하고 있었다. 1964년에서 1974년까지 부정기적으로 밴드 지휘자들 맡았던 프레드 웨슬리는 항상 “실패한 비-밥 트롬본 주자”를 자처했으며, 70년대 훵크 세션을 마치자마자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함께 연주를 계속했다. 브라운은 드럼 세트를 조직하는 방법을 개발해냈으며, 밴드의 모든 것을 멜로디보다는 그루브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혁명이다.

by BaronSamdi | 2009/10/04 21:17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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