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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대부 : 소울 파워 “우리가 이 세션을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훵크가 나왔는지 알게 될 겁니다.” ![]()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은 1933년 5월 3일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반웰 외곽 소나무 숲에 위치한 단칸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브라운이 4살이 되던 해 이혼했고, 그의 아버지는 어린 브라운을 부양하기 위해 그를 내버려둔 채 장시간 일을 해야 했다. 오두막집을 전전하면서 살던 그는 6살이 되자, 조지아 주 어거스타의 고모가 운영하는 매음굴로 이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도박, 밀주 그리고 매춘” 사이에서 성장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는 춤을 춰서 돈을 벌기도 하고, 구두도 닦고, 목화도 땄으며, 운동도 하고,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다 마침내 물건을 훔치기에 이른다. 그는 여러 번 “복장 불량”을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와야 했다. 15살이 되어 코트를 훔치기 위해 차를 부순 혐의로 8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가스펠 합창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는데, 이는 3년 후 가석방으로 출옥했을 때, 연예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제임스 브라운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음악가로 인정받았고, 좋은 매너와 매력적인 품성 그리고 일에 열성적인 모습을 통해서 교회 사람들 혹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이집 저집을 전전할 수 있었다. 브라운에게 내려진 대부분의 법정 판결은 미국의 가혹한 사회 체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그에게 동정적인 흑인 공동체의 네트워크 덕택이었다. 브라운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첫 번째 밴드 지휘자였던 바비 버드Bobby Byrd의 어머니가 그를 집에 받아들였고, 버드 가족의 관대한 보살핌은 이후에도 성심껏 이어져 브라운의 음악 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2년, 바비 버드의 가스펠/ 두-왑 그룹에 참여한 뒤, 그는 번개같이 빠른 몸놀림, 다리 찢기splits, 미끄러지는 발놀림slides 그리고 낙타 걸음camel walk 덕분에 차츰 밴드의 중추가 될 수 있었다. 후에 이 밴드는 '플레임즈The Flames'가 된다. 플레임즈는 곧 랠프 베이스Ralph Bass를 만나서 신시내티의 킹 레코드 산하의 페더럴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다. 이 그룹은 혹독하게 투어를 돌고, 노래를 하고, 역경을 견뎌내면서 점점 쇠락해버렸다. 제임스 브라운의 1956년 작 “Please, Please, Please”는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R&B의 고전이 되었고, 1958년에 뒤이어 발표한 “Try Me”가 그를 전국적인 스타의 위치로 높이 쏘아올렸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아폴로 극장의 공연에서 콘서트를 주최했고 이 실황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최초의 성공적인 흑인의 콘서트 실황 음반이었다. 이 앨범은 이내 팝 차트 정상으로 솟아올랐다. 1963년이 되기까지 브라운은 수많은 댄스 히트곡과 발라드 곡을 레퍼토리로 삼는 흑인 음악계의 최고의 거두였으며 그의 호소력은 인종적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호텔 라운지와 대학의 학생 회관에서부터 화려한 R&B 댄스 홀과 시의 음악당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브라운은 나타날 때마다 작은 소용돌이를 휘몰고 다녔다. “제임스 브라운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하던 짓을 멈추고 돈을 모았죠.” 피 위 엘리스는 (제임스 브라운의 전기) 작가 신시아 로즈에게 아무런 과장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거다! 하면서 모두가 몰려 갔지요.” 브라운은 그의 음악을 보다 색다르고 재즈적인 요소가 더 가미된 형태로 편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악기들을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재즈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잼 세션은 무대 위에서나 스튜디오 안에서나 그의 창조성 속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제임스는 그의 밴드로부터 영혼을 쥐어짜냈고 그 결과물을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배치했다. “당신도 그걸 따라잡으려면 머리를 좀 빨리 굴려야 했을 겁니다.” 색소폰 연주자 메이시오 파커Maceo Parker가 1990년 로즈에게 한 말이다. “일례로 많은 솔로 연주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그가 이름을 크게 외치면 그냥 목청껏 불어야 했지요. 흘러가는 연주에 잘 맞아 들어가기를 바라면서요.” 그것이 바로 "임프로비제이션(즉흥성)improvisation"이었다. 임프로비제이션(즉흥성)은 이 소울 대부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졌으면서 제임스 브라운 음악의 엔진을 가동시켰다. 대중들의 추측과는 반대로, R&B 가수로서의 그의 명성은 그의 예술적 취향에 비하면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나는 결코 R&B 가수였던 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로 분류될 뿐이죠.” 그는 1986년에 기자인 츄이 발레라Chuy Valera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음악은 가스펠과 재즈, 그리고 소위 훵크와 소울이라고 불리는 것들로부터 왔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훵크와 소울이야말로 진정코 재즈가 아닐런지요.” 그의 밴드 지휘자들이 뛰어난 재즈 연주자였던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훵크 태동기의 밴드 지휘자였던 앨프리드 “피 위” 엘리스는 1965년 밴드에 들어올 당시, 위대한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의 음악을 연구하고 있었다. 1964년에서 1974년까지 부정기적으로 밴드 지휘자들 맡았던 프레드 웨슬리는 항상 “실패한 비-밥 트롬본 주자”를 자처했으며, 70년대 훵크 세션을 마치자마자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 함께 연주를 계속했다. 브라운은 드럼 세트를 조직하는 방법을 개발해냈으며, 밴드의 모든 것을 멜로디보다는 그루브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를 깨우치게 하는 혁명이다. ![]() 역설적으로 전국적으로 파괴행위를 야기했던 도시의 지하 세계는 자유주의자들과 미국의 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아주 존경받는 예술인들 중 대부분이 “블랙 파워” 운동에 지지 - 운동을 지지했던만큼이나 그 지지 자체도 모호했다. - 를 보냈다. 뛰어난 작가이자 익살꾼이었던 랭스턴 휴즈는 1967년에 <표범들과 채찍The Panthers and The Lash>을 출판했는데, 시 “흑표범”은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감상을 포착하고 있다. “흑표범/ 거의 절망적인 대담함으로/ 가식을 벗어던진 채/ 가장 오래된 거짓말의/ 가장 진실됨에 사로잡힌 채” 뛰어난 작가이자 시인인 니키 지오바니Nikki Giovanni 또한 1968년 펴낸 시 “현재적 대화의 진정한 의미, 흑인 대 깜둥이”에서 이러한 발작적인 정서를 포착하고 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 깜둥아! 죽여 버릴 수 있지? 죽여 버릴 수 있지? 깜둥이가 죽일 수 있지? 깜둥이가 흰둥이를 죽일 수 있지? 깜둥이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지? 너는 깜둥이를 죽일 수 있지? 그렇지? 깜둥아? 죽일 수 있지? 너는 백인을 죽일 수 있지? 너는 깜둥이를 죽일 수 있지? 네 안의 깜둥이를? 폭력적인 심상으로 써내려 간 것은 자유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꺼이 자유를 위해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는 모든 흑인 예술에 걸쳐 나타나는 울림이다. H. 랩 브라운, 엘드리지 클리버, 딕 그레고리Dick Gregory, 니키 지오바니, 아미리 바라카, 그리고 다른 많은 유명인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흑인 혁명을 설파했다. 화가, 작가, 연설가들은 생생한 텍스트에서 모든 유럽적인 것을 폄하하고 떠오르는 흑인들의 숙명을 확정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예술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놓았다. 극작가 바라카의 <노예 The Slave>는 흑백 간의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흑백 혼혈 가정의 얘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설가 샘 그린리Sam Greenlee의 <문가에 앉은 허깨비(비밀 요원)The Spook Who Sat by the Door>은 미국의 체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비밀리에 흑인 게릴라들을 훈련시키려고 직장을 그만둔 흑인 CIA 요원의 얘기를 다뤘다. 흑인 민족주의에 빠져든 재즈 뮤지션들은 연주를 통해서 그들의 관점을 표현했다. “정의Justice”, “지금 이 때다Now's the Time” 그리고 “흑인 혁명Black Revolution" 등의 제목이 일반적이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사용한 문구 “블랙 파워”는 법률적 용어였던 “검둥이Negro”가 압제자들이 만들어낸 몹쓸 표현이라는 점을 알리는 운동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블랙 파워”는 행진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마침내 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에 의해 노래로 불려졌다. “크게 외쳐라! 나는 흑인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그의 후렴구 “크게 외쳐라!Say it loud!”는 (전통적인 부름과 응답call and response의 형식으로) 미국의 미래인 아이들의 합창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흑인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흑인 민족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강조점을 두는 능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새들, 벌들처럼 뭉친다. 무릎 꿇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 크게 외쳐라! 나는 흑인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 제임스 브라운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 (1968) 흑인이라는 말은 칭찬하는 말, 최상급의 찬사, 도상icon이 되었다. 행진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울 가수, 흑인 민중의 주류들, 그리고 마침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법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흑인임에 대한 찬미는 자유로운 존재들, 노여움과 분노 그리고 연민을 가질 자유, 궁극적으로는 사랑할 자유를 가진 자들, 즉 가장 새로운 형태의 검둥이들에게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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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등록된 덧글
엑스멘과 훵크면 저랑 ..
by BaronSamdi at 12/21 저 이사람들 좋아합니다. .. by 프 at 12/20 저야 뭐 재정적으로 풍.. by BaronSamdi at 12/15 훵크 베이스의 기초를 .. by BaronSamdi at 12/15 그래도 그렇게 일빡시게.. by 테디준 at 12/15 음냐 얼마전에 슬라이스.. by 테디준 at 12/15 다른 곡은 잘 모르겠고 .. by BaronSamdi at 12/02 이분의 모든 앨범이 거의 .. by mmkisa at 12/02 홍콩에 잠깐 다녀오느라.. by BaronSamdi at 11/29 아이고..바로 그 오마르.. by 큐팁 at 11/26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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